스토리1

[스크랩] 푯대를 향하여

(주) 어울림 2011. 12. 9. 13:03

목표를 향하여 빌립보서 3:10~16

 

사냥꾼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쏘아 총알에 맞은 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만 조금 나고 살아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땅에 떨어진 새를 들어올렸더니 그 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만일 저를 새장에 가두어 두시면 아저씨의 비밀을 다 이야기 할 거에요. 아저씨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아저씨 친구들이 다 알게 되면 큰일 아니에요? 그 대신 저를 놓아주시면 아저씨가 성공할 수 있는 세 가지 지혜를 가르쳐 드릴게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그 새의 말이 하도 신기해서 성공의 비결을 알려 주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놓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그 새는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마세요. 무슨 일이나 한번 살펴보시고 우선 시험해 보세요.

둘째, 능력 한계 이상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실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셋째, 실수를 했을 때 그것으로 너무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이 성공의 비결을 새로부터 들은 사냥꾼은 약속한 그대로 새를 공중에 놓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새는 날개에 힘을 주어 날아 올라가 맞은편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에요. 그러니까 저를 놓아 주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저는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아마 이것만 있으면 아저씨는 억만장자가 되고도 남을 거에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새가 앉아 있는 나무로 달려가 그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는 처음에는 제일 낮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는데 사냥꾼이 가까이 오르면 그 다음 윗가지, 그 다음 윗가지로 올라갔습니다. 사냥꾼은 새가 위로 올라가면 그 새를 잡으려고 같이 위로 따라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나무 꼭대기까지 거의 올라가서 그 새를 잡으려고 팔을 벌리다가 그만 나뭇가지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서 사냥꾼은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 새는 사냥꾼을 향해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에요. 제가 세 가지 지혜를 가르쳐 주었는데 몇 분도 못 되어서 다 그르치고 말았어요.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제게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했지요? 그 말을 왜 그대로 믿지요?

둘째, 능력 한계 이상의 일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며 무엇 때문에 잡을 수 없는 저를 잡으려 하세요?

셋째, 물릴 수 없고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지도 말라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저를 놓아 준 다음에 다시 되돌리려 저를 잡아 가두려 했지요?”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새와 어리석은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새가 사냥꾼에게 준 이야기를 우리는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녁 읽은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빌립보서 3장 12-14절까지의 말씀을 다 함께 읽었으면 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일생을 경주자가 경주하는 것에 비유해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승리하는 경주를 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온몸을 기울여 달려가야 합니다. 몸은 미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눈은 그 목표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잘못 내렸던 결정, 남에게 심하게 한 말,

우리가 범한 죄, 실수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과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거는 우리에게 남아 있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가슴에 슬픔에 안겨 주고 우리의 나아가는 앞길에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있는 그대로 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에는 지워버리고 싶지 않은 행복한 시간들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뒤를 돌아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후회하는 일도 가치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후회가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은 현재의 모든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후회는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후회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회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후회는 좋은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더 고상한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의 선한 의도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참된 후회는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악의 충동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후회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개 다음에 오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잊어버립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용서를 ‘Forgive’라고 하고, 잊는다는 말을 ‘Forget’이라고 합니다.

용서하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은 같은 어근입니다.

우리는 뒤엣 것은 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미 볼리비아라는 환경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면 승리자가 되고,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낙오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자가 되려면 남이 쉬고 있을 때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남이 걸을 때 나는 달려야 합니다.

 

역사는 곧 변화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을 원하십니까? 승리를 바라십니까?

목표를 분명히 세우세요. 그것이 이상이라도 좋고,

비전이라고 해도 좋고, 꿈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비전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먼저 뜻을 세우고, 목표를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세우되 큰 목표, 높은 목표, 옳은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목표를 세우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해서 인생의 대업을 성취한 사람을 보면 모두 마음 속에 간절한 소원, 분명한 목표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를 위해서 먼저 목표를 세웁시다. 내 마음에 간절한 소원, 분명한 목표가 있

 

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위하여 내 정성을 쏟고 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강한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자나깨나 일심전념으로 그 생각에 몰두하면 그 소원에서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신이 한 목표에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개인 교회 자녀들의 목표를 함께 세우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때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고 요청한 일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가나안 여인이 그렇게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예수님은 처음에 못 들으신 척 하셨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르짖으니까 제자 중 한 사람이 와서 “선생님, 이 여자가 아까부터 와서 이렇게 졸라대는데 그저 한 말씀하셔서 돌려 보내시면 좋겠어요. 이거 도무지 시끄러워 못 견디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인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계속 요청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이 가나안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씀이었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화를 내지 않고 “개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부스러기라도 좀 주세요.” 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이때 그만 예수님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부스러기는 그냥 부스러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데 물로 씻는 것이 아니랍니다. 식탁위에 있는 빵을 조금 잘라서 수건 대신 손을 씻고 옆에 두면 부스러기 같이 바가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개가 주워먹습니다. 한 마디로 손씻은 걸레와 같은 빵 부스러기라도 개가 주어먹듯이 저는 그 은혜를 먹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아니 지금 계십니다만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녀에 들린 귀신이 떠나고 자녀의 병이 낫는다면 손 씻은 걸레와도 같은 빵부스러기뿐만 아니라 발 씻은 물이라도 아니 저같으면 그 물에 독이 있다 하더라도 마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시험하신 적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지 보려 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이유가 과연 진정하게 믿는 사람이 이 땅에 몇사람이나 있겠느냐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믿기만 하라 해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어떻게 손 씻은 빵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나를 부인하고 어떤 취급을 받아도 내 자녀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내 교회가 세워진다면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자리잡게 됩니다. 겸손하지 않다는 말은 곧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시골에서 허리 아픈데 가장 좋은 약은 변입니다. 똥입니다. 병을 볏짚으로 막아서 뒷같에 담그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 액체가 고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허리병에 직통이라 해서 시골에서는 많이 먹습니다.

하물며 그까짓 먹어도 생명에 아무런 지장 없는, 기분이 그렇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지 딸아이가 고침받고 살아나는데 그까짓 부스러기 빵이 대수입니까?

정말 자녀를 사랑하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내 살이라도 파서 먹여야 합니다. 내가 숙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그것은 수모가 아니라 영광이 나타납니다. “내가 죽으면 자녀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교회도 살고 그리고 나도 비로소 삽니다(산다)”. 따라서 합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도 사신다”.

두로지방은 이방지역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지역에서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정성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믿음이 있는 진정한 기도의 힘은 놀랍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옆에는 수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한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여기에 도전해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의 차이입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목표인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목표인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는 목표인가 볼리비아를 복음화시키겠다는 목표인가 그렇다면

그럴 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계속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노라면 언젠가는 내게 기회가 올 것입니다.”라는 윈스턴 처칠 경이 남긴 말은 유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백절불굴의 투지와 칠전팔기의 끈기를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 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목표를 향해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극적으로 걸리기 쉬운 것, 방해가 되는 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꼭 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뽐낼 것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난 날의 일만을 자랑합니까? 지금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바쁜 사람은 과거의 일 자랑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르러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그 목표에 가 있어야 합니다.

뒤를 봐도 안됩니다. 옆을 구경해도 안됩니다. 우리의 눈은 목표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물론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표만 정해놓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없으면 그것은 공상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힘써야 합니다. 힘쓰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도전적인 말입니까?

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여럿이 달려도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인내해야 골인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승리적인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이제 오늘이 지나면 12월입니다 이제 올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여야 합니다.

주님앞에 가서 뭐하다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

 

“주님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나를 건져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은혜만을 바라보고 달려왔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 못자국난 손을 내미시며

“내가 다 안다 아들아 딸아” 하시며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정해졌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있게 달려가야 합니다.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야 합니다.

죄의 짐은 벗어버리고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인내로 달려가야 합니다.

앞에 있는 상을 잡으려고 좇아가십시다. 그럴 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출처 : Peter의 블로그
글쓴이 : Pet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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